FF16
리뷰
* 굉장히 주관적인 후기이자 감상이니 문제가 있다면 님 말이 맞음.
* 스포(FF14스포도있음), 불호도 있는 후기임. 불호 발언이 싫다면 뒤로가기 추천.
게임을 한 직후, 트위터에 꽉 끼는 악플 같은 후기를 작성했었다. 그걸 다시 보니 그땐 게임 엔딩을 본 직후여서 많이 흥분했었나 봄; 근데… 솔직히 그럴만한 요소들이 있긴 했다. 아무튼 두 달쯤 흘렀으니 다시 돌이켜보면서 정리해 볼 것임. 나는 FF14 유저다. FF14의 스토리를 좋아했고 유저들끼리도 웬만하면 분쟁을 피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거의 유일하게 하는 온라인 게임이나 다름없다. FF14는 자극적인 요소가 적다. 따지자면 성적인 코드를 부각시킨다던가 유희거리로 삼지 않으려는 편인 게임이라는 거다. 뭐 특정 장소에 가면 바니걸을 연상시키는 옷을 입거나 폴댄스를 추는 NPC들이 보이긴 하지만 눈살을 찌푸릴만한 연출까지는 아님. 나는 그런 FF14의 프로듀서인 요시다 나오키를 믿고 FF16을 샀었다. 그리고 슬픈 일이 벌어졌다.
1. FF16은 시작과 동시에 유저의 몰입도를 굉장히 사로잡고 들어간다. 보여줄 수 있는 자극적인 요소는 모두 사용한 느낌이었다. 전쟁터에서 파리목숨처럼 갈려 나가는 사람들. 잔혹한 폭력과 죽음의 묘사. 그리고 깜빡이도 안 켜고 튀어나오는 선정적인 장면. 그런데 그 정도가 뒤로 갈수록 좀 과해진다. 아무리 사람이 아닌 소환수의 모습이었다지만 피닉스가 이프리트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행당하는… 그 장면을 참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야 속 알맹이는 고작 10살이나 겨우 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보기 힘들어서 화면을 가렸더니 소리가 끔찍해서 헤드셋까지 벗고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그 장면이 끝나질 않더라. 솔직히 여기에서 탈주할 뻔했다. 하지만 내가 지른 돈이(…) 있었고 어쨌거나 스토리가 궁금했기에 결국 게임을 이어 나갔다.
내가 게임을 큰 불쾌함 없이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건 ‘가루다 전‘까지였던 것 같다. 베네딕타라는 캐릭터에게 큰 매력을 느꼈고, 무엇보다 가루다 소환수 폼의 디자인이 정말 잘 뽑힌 데다가 성격까지 취향이었다. 전투씬 연출도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서 이때 게임에 대한 기대가 수직상승함. 그럼 이다음은? 안타깝게도 실망의 연속이었다.
2. 중반부터 캐릭터들의 대사나 사고방식이 어째 좀 단순해졌다고 느꼈다. 클라우드, 질은 틀에 박힌 정직한 선인들이고 악역들은 틀에 박힌 개자식들이다. 주인공이 안 불어도 될 이야기를 줄줄 필리버스터 해서 악역들의 분노를 사거나, 누가 봐도 클리셰적인 뻔한 행동을 일삼아서 고구마 전개 못 보는 사람들은 이거 보다 뒷목 잡겠다 싶었다. (근데 난 선하고 우직한 캐릭터를 좋아하는 편이라 나쁘진 않았음.) 거기에 단순하고 유치한 대사들까지 합세해서 무겁고 어두운 게임의 분위기와 캐릭터들의 행동이 맞지 않다고 느낀 것, 더불어 설득력까지 부족하게 다가오니까 몰입이 좀 힘들었다. 인터뷰를 찾아보니 요시다가 일부러 성인이 즐길 수 있는 잔혹한 다크 판타지를 원해서 왕좌의 게임 같은 매체까지 참고해다가 이 게임을 만들었다고 함. 그와 동시에 대사는 일부러 그 시절의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중2병들이나 사용할 법한 것들을 차용했다고 했는데 이 두 설정이 충돌한 게 문제라고 봄.
그런데 영어 더빙으로 바꾸니까 이런 감상은 확 줄어들더라. 일어 더빙은 인물들이 기껏해야 젠장, 망할! 이런 욕이나 할 착한 바보 같은 이미지였는데 영어 더빙으로 바꾸니까 클라우드가 욕도 잘만 하고 확 와일드해져서 세계관 분위기랑 훨씬! 정말 훨!씬!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너무 아쉬웠음ㅠ 이럴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영어 더빙으로 플레이했을 텐데.
3. 대체 왜 그렇게 알몸을 좋아하는 걸까. 성인 게임이니 그럴 수 있다만, 그런 연출을 부담스러워하는 편인 내 주관적인 감상에서는 과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베네딕타는 리타이어한 뒤로도 틈만 나면 홀딱 벗은 알몸의 환영, 과거 회상, 혹은 알테마가 변한 나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직후 플레이어가 만나는 조력자는 사창가의 창부, 마담이다. 그곳에서는 메인 스토리와 하등 상관없는 쓰레기 같은 남자 때문에 죽은 어린 창부의 시신을 찾는 퀘스트를 진행해야 한다. 대체 왜 이걸 메인에 넣어둔 건지 의문이다. 전혀 판타지스러운 일도 아니고 이 게임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와 조금도 관련이 없을뿐더러 현실에서 하루가 멀다고 벌어지는 범죄와 똑 닮아있는 이야기를 굳이 메인 스토리에 넣어둔 이유를 모르겠다. 게다가 주인공인 클라우드는 세계관 내에서 가축, 노예나 다름없이 천대받는 신분인데 사창가의 마담에게 신뢰의 증표를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마주치는 병사, 상인 등 남성 NPC들의 부러움을 산다. 여기까지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이 다음엔 곧장 환락가로 보내주더라. 주인공 일행은 매춘 업소에 숨는다. 일행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질이 불쾌함을 나타내니 중년 남성 캐릭터인 시드는 직원에게 돈주머니를 쥐여주며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주인공 일행이 대화를 나누는 컷신 내내 심심하면 여자의 신음소리가 효과음처럼 끼어든다. 매춘 업소. 어린 창부의 잔혹한 죽음. 이 모든 것들을 어떤 성별의 유희거리 그 이상 이하로도 아닌 소재로 사용했다는 게 진심으로 유감스러웠다. 비슷하게 오딘과 알테마의 독대 중, 알테마가 오딘 어머니의 모습(역시나 또 나체)으로 변한 컷씬에서도 불쾌함을 느꼈다. 50은 넘어 보이는 나체의 중년 남성이 20대 외형을 한 나체의 어머니의 다리를 끌어안고 허벅지에 뺨을 비비며 미소 짓는 장면을… 나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 심지어 메인 스토리에서는 오딘과 오딘의 어머니가 어떤 관계성,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언급조차 없다. 유저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면 적어도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는 도중 힌트라도 건네줬어야 하는 게 아닐까. 여기에서 이 게임에서는 남자도 공평하게 벗었는데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당연히 벗기야 벗었지. 그런데 저런 불쾌하고 포르노적인 연출로 소비되진 않았잖아.
4. 같은 게임을 연출한 프로듀서의 게임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같은 타이틀을 공유하는 시리즈라서 그럴까. 후반부에서 모든 진상이 밝혀지면서부터는 어디서 비슷하게 본 듯한 장면과 설정들이 연상됐다. 고댓적부터 살아오던 자신의 동포들을 부활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알테마. 심지어 그 동포들은 새 세계를 창세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해서 그 계획의 발판(마더 크리스탈)이 됨. 여기에서 세밀한 설정들을 제외하고 큰 틀만 떠올리려니 종말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희생해서 야만신을 만들고 그 안에 잠든 채로 봉인 당했던 고대인들과, 동포들이 있던 완전한 그때로 돌아가겠다며 빛의 전사와 대립했던 어떤 12000년 묵은 고대인이 떠올랐다. 16의 알테마와 14의 고대인을 동일시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진상의 큰 틀이 닮아있다는 감상이 들어서 오~ 싶었다는 얘기다. 알테마의 최후에서도 그걸 느꼈다. 검을 던져서 빛과 함께 알테마의 배를 뻥 뚫어버리고 마지막 카운터는 맨주먹으로 얼굴에 죽빵을 꽂아 해치웠다는 부분. 14에서 어떤 고대인과 금발 스토커를 처치하던 연출이 떠올라서 이런 식의 리타이어 연출이 요시다 취향인 건가? 요시다의 로망인 건가?? 하는 감상이 들길래 좀 웃겼음ㅋㅋ. 그리고 죽빵은 나도 시원하긴 했어ㅋ.
5. 16의 엔딩은 의문과 씁쓸함으로 가득했다. 정확히 누가 죽었고 살았다는 걸 보여주지 않았던 열린 결말. 연출만 보고 짐작했을 때, 클라우드는 죽은 게 확실한 것 같고… 조슈아는 살아남은 걸까 죽은 걸까. 마지막 쿠키영상같은 컷씬에 조슈아의 서명이 된 책이 있었던 걸 보면 살아남았다는 여지를 주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냥 조슈아라는 캐릭터가 좋았기에 살아남은 거라면 좋겠다. 장하잖아. 애가 그 어릴 적부터 얼마나 고생했는데. 사실 전혀 스포 없이 게임을 진행했어서 나는 정말 냅다 주인공을 죽여버리는… 엔딩이 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 씁쓸하게 느꼈던 듯. 마지막 결전을 치르기 전 거점에서 떠나던 클라우드 일행을 보고 오열하던 질이 자꾸만 떠올랐다. 질은 이렇게 될 줄 알고 그렇게 괴로워했던 걸까. 아무튼, 엔딩까지 다 보고 나서는 그냥… 클라우드가 너무 안타까웠다. 시드의 유지를 이어받아 어떻게든 나아가고자 발버둥 치며 이뤄냈던 그 모든 삶과 여정, 게다가 탄생과 그 존재조차 사실은 알테마의 계획으로 안배된 것들이었다니. 유저인 나로서도 내가 한 좃뺑이가 알테마를 손 안 대고 코 풀게 해준 일이었다고? 싶어서 배신감 들었는데 그 삶의 주인이었던 클라우드는ㅋ… 그 상황에서도 벅저벅저 나아가다가 결국 마지막까지 하얗게 전부를 불태우고 쓸쓸하게 죽어갔다는 점까지 너무ㅋ 마음이 쓰였다. 어떻게 보면 기만스러운 엔딩이라고 느끼기도 했는데 파도에 떠밀려 온 클라우드가 달을 올려다보는 마지막 순간의 연출을 잘해서 그런가. 그 씁쓸한 여운이 참 오래 남아있는 게 좋았음. 그리고 클라이브가 마법, 베어러, 소환수, 도미넌트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평범한 세계를 만들어낸 것도 >파이널 판타지<라는 이름에 걸맞은 엔딩인 것 같았고.
6. 액션과 전투 연출, 각기 다른 자연을 담은 필드가 좋다. 특히 사막이! 너무 아름다워서 좋았다. 소환수를 교체해 가며 싸우는 방식도 새로워서 좋았고. 내가 컨트롤이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닌데 나중에 이것저것 손에 맞는 걸로 배치해서 입맛대로 사용하니까 너무 재밌더라. 그리고 공중전 연출이 꽤 나오는데 난 그게 특히 좋았음. 일단 멋있잖아…ㅋ. 다만 보스전의 경우엔 몰입한 상태에서 미션 완료 창을 띄우며 팡파레를 울리는 게 좀 미스였다고 생각함. 빡 집중해서 몰입도 수직상승하다가 갑자기 팡파레 터지면 몰입 뚝 끊기는 느낌이어서 아쉬웠다. 전투만 생각해도 나중에 심심하면 DLC 하나쯤은 사서 플레이해 볼 듯.
결론 : 파판 시리즈는 익숙한 것들이 다른 세계관에서 전혀 다른 존재로 나오는 걸 볼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인 것 같음. 비록 일부 연출 문제로 실망하긴 했지만…. 스토리 자체는 아주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함. 파판 시리즈 팬이라면 한 번쯤 해볼 만하다. 그런데 이제 선정적인 연출과 잔혹성, 성 인지 감수성에 구멍이 난 컨텐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나는 제법 힘들었어서.) 그런데 나처럼 14를 좋아해서 14의 느낌을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비추. 후기에 내내 썼지만 16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어둡고 MSG 범벅이다. 요시다가 14에서 못한 거 16에 한풀이하는 느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