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
오늘도 영화를 봤다. 근래에 들어 영상물 집중해서 오래 보는 게 힘들었는데 같이 떠들면서 봐주는 오리 덕에 하나씩 도장 깨기 하듯이 격파해나가고 있음. (고맙습니다.) 기력 문제로 좀 짧은 후기가 될 것 같지만 일단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
1. 영화의 첫인상은 와 이거 진짜 프랑스 영화 같다.(당연함. 프랑스 영화임.) 그리고 색을 정말 잘 쓴 것 같다- 였음. 영화의 시작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마리안느로 시작하는데 마리안느는 이때 짙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갔을 때, 마리안느가 입고 있는 건 붉은 드레스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에서 마리안느가 입고 있었던 짙푸른 색의 드레스를 엘로이즈가 입고 있다. 뭐 푸른색이 우울함을 상징한다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니, 짙푸른 우울과 붉은 열정을 빗대어서 인물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었음. 밀라노를 그리워하며 아주 오랫동안 웃음을 잃은 채 살아가던 엘로이즈의 어머니. 자신도 그렇게나 싫어했던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팔려 가듯 해치우는 결혼이라는 족쇄를 딸에게 물려주려는 그 또한 우울한 푸른색을 두르고 있다. 엘로이즈는 언니의 죽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팔려 가듯 결혼해야 한다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이 순간을 꿈꿔왔어요.” “죽음을요?” “달리기를요.” 이 대화만 봐도 엘로이즈가 얼마나 억압된 환경에서 숨 막히는 인생을 살아왔을지가 보임. 반면 마리안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가로서 활동할 테니 결혼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고, 자신의 예술 활동에 열정을 지닌 화가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속이고 초상화를 완성하기까지, 엘로이즈는 푸른 드레스를 입는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고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엘로이즈는 초상화의 모델이 되기 위해 푸른 드레스가 아닌 녹색 드레스를 입는다. 녹색 또한 여러 상징을 담고 있다. 기본적으로 질투, 독 등 부정적인 것들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엘로이즈의 드레스는 성장이나 평화 희망 같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소소한 궁예를 했었음.
2. 규칙. 관습. 이념. 마리안느가 몰래 완성한 초상화를 본 엘로이즈는 이것이 자신이냐 묻는다. 그리고 마리안느가 대답한다. 그림에는 규칙과 관습 그리고 이념이 있다고. 아마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잘 만들어진 상품처럼 팔려 가던 그 시대의 여성을 포장하기 위한 규칙, 관습, 이념이겠지. 엘로이즈의 초상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엘로이즈의 말마따나 생명력이나 존재감 따위는 없고, 온화하며 순진하게 미소 짓는 예쁘장할 뿐일 얼굴. 엘로이즈는 초상화에 그려진 자신을 부정한다. 동시에 결국 결혼을 위한 초상화를 그리는 일 또한 받아들였다. 이미 정해져 있는 자신의 운명에게서 달아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저렇게나마 의문을 품고 부정하고 자신의 존재는 그렇지 않다고 외치는 엘로이즈의 용기가 좋았고 동시에 슬펐다.
3.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 그냥 대놓고 엘로이스는 에우리디케고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라는 걸 떠먹여 준다. 그 뒤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맨 처음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배를 타고 섬으로 향하던 첫 장면이 떠올랐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찾기 위해 배를 타고 지옥의 강을 건넜던 것처럼, 마리안느 또한 강을 건너 엘로이즈에게 닿았다는 걸 생각하면 첫 장면부터가 복선이었구나 싶었음.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소피는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를 책망했고, 화가인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것이라 말했다. 두 사람이 오르페우스를 책망하거나 오르페우스의 관점에서 말할 때,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뒤돌아보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가만히 되짚어보면 애초부터 에우리디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자신의 생존이 걸린 일에 대한 모든 권리가 오르페우스에게 달렸으니, 어쩌면 그 한 번만큼은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결정짓고 싶었던 엘로이즈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음.
4. 저택의 주인인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집을 떠나있던 5일. 하녀의 앞치마를 입고 요리를 하는 아가씨. 앞치마를 벗고 수를 놓는 하녀. 그들에게 포도주를 따라 건네는 화가. 그들은 고작 한 명의 부재로 친구가 됐다.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고, 나들이를 가고, 곤란한 일을 돕는다. 자연스럽게 신분을 잊은 듯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 여자의 일상이 좋았다. 특히 영화 시작하고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음악이 깔리는 장면. 영화의 모든 장면이 내내 고요하다가 거기에서 갑자기 확 고조되면서 영화 제목 그대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나타나는 연출이 좋았음.
5.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굴 보겠어요?“ 사실 이 장면만 볼 땐 이야 플러팅 죽인다. 이딴 감상만 하고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한 번 더 곱씹게 된 대사. 나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당연히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계가 흘러나오는 그 긴 테이크 내내 마리안느의 시점처럼 엘로이즈의 얼굴만 보이기도 했고. 그래서 같이 본 오리가 마지막 장면에서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봤다 안 봤다로 되게 난리였다는 말을 했을 때도 이해를 못 했는데, 다시 인상 깊었던 장면 한 번씩 돌려 보다가 저 대사를 마주하고 어라…? 싶었음. 어떻게 보면 정말 마리안느를 봤지만 못 본 척하고 있다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아니면 사계를 들으면서 추억 속의 마리안느를 보고 있다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님말구ㅎ. 암튼… 잔잔하고 조용해서 밤에 보기 좋은 영화였음. 즐거웠다!